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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아마존에서 주문한 “Gumby Imagined” 책을 받았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이 책을 대충 훑어보다가 뜻밖의 발견을 했답니다. 스튜디오의 스텝 명단에 제 이름이 들어가 있었던 거죠! 프로젝트에 스텝으로 참여하긴 했지만, 책에도 제 이름이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거든요. 활자로 인쇄된 제 이름을 보니 영상의 엔딩 크레딧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트 클로키 프로덕션은 1960년대 미국에서 스톱모션으로 만든 TV 시리즈 “Davey and Goliath”로 큰 인기를 얻은 바 있는데요. 2000년대 초반에 이 시리즈를 토대로 장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만들었죠. 당시 저는 이 장편에 나오는 인간 캐릭터의 관절뼈대를 전담했습니다. 이때만 해도 아시아 출신의 관절뼈대 제작자가 미국 장편 스톱모션에 참여하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어요. 이런 이유로 이 프로젝트는 제게는 뚜렷이 기억에 남는 작업이 되었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막바지에는 작업에 참여한 전체 스텝의 사진이 언론에 공개된 적이 있는데요. 저는 지금처럼 한국에서 작업하고 있던 지라 그 사진을 함께 찍지는 못 했죠. 그런데 아트 클로키 프로덕션은 이때도 사진 캡션에 일부러 제 이름을 넣어 주었습니다. 저는 미처 생각치 못했던 부분이었는데 신경 써주니 고맙더라구요. 이러한 이름 기재 여부는 일면 사소한 문제인듯 보이지만, 스텝의 입장에서는 그 의미가 굉장히 크죠. 해당 프로젝트에 참여한 동료이자 담당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을 받는다는 거니까요.

2000년대 초반은 한국에서 관절뼈대 제작을 단순한 제조업 정도로 취급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관절뼈대는 사실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가 성립하기 위한 핵심 요소인데요. 당시 한국의 스톱모션 업계에서는 관절뼈대 제작을 하나의 전문 분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죠. 그저 청계천 철공소에 하청을 맡기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사람이 만든 관절뼈대는 그 한계가 명확했습니다. 게다가 금속 가공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이 캐릭터 그림에 고작 관절 몇 개 그려넣고 뼈대를 디자인하고 제작했다고 말하는 것도 참 기가 막혔죠. 대충 찍어낸 부품으로 대량 생산한 기성품 뼈대를 주문제작 뼈대라고 주장하는 것도 어이가 없었습니다. 제가 만드는 주문제작 뼈대는 각각의 캐릭터에 맞는 맞춤 부품을 기계로 하나하나 직접 깎아서 만듭니다.

이렇게 관절뼈대 제작자에 대한 개념조차 제대로 서 있지 않았던 한국 상황에서 해외의 유명 스튜디오에게 전문성을 보유한 동등한 작업자로 인정을 받으니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마무리되고 난 후에는 스텝으로 참여했던 한 애니메이터에게 좋은 관절뼈대를 사용하게 해줘서 감사하다는 메일도 받았었죠. 프로젝트에 참여한지 15년도 넘은 지금, 이 책을 들춰보다 제 이름을 발견하게 되니 다시금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네요.

아트 클로키와 조 클로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네요. 두 분 모두 부디 좋은 곳에서 편히 쉬시길…

Art Clokey is a pioneer in the popularization of clay animation, but Koreans don’t know much about him and his works. I recently heard that <Gumby Imagined: The Story of Art Clokey and His Creations> has been published. I personally have a special interest in him because I participated in a special episode of his famous TV series <Davey and Goliath> from 2002 to 2003.

초록색 지우개처럼 생긴 ‘검비(Gumby)’는 미국인들에게 풍요로웠던 1950-6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대표적인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검비 쇼(The Gumby Show)>에 나오는 캐릭터입니다. 미국 스톱모션의 대표 아이콘인 검비의 탄생 뒤에는 아트 클로키(Art Clokey)라는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거장이 있었습니다.

1955년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학생이었던 클로키는 <Gumbasia>라는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클레이의 물성을 실험합니다. 이후 그는 유동적이고 성형이 쉬운 클레이의 특성을 활용해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당시 그가 만든 캐릭터들은 미국 가정에 TV가 널리 보급되면서 큰 인기를 얻게 되지요. 이런 이유로 클로키는 윌 빈튼에 앞서 클레이 애니메이션을 대중화한 선구자로 애니메이션 역사에 기록됩니다.

아트 클로키는 제게도 의미 있는 이름입니다. 클로키 프로덕션이 1960-70년대에 히트시킨 또 다른 TV 시리즈 <다윗과 골리앗(Davey & Goliath)>의 스페셜 작품에 제가 관절뼈대 제작자로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이 TV 시리즈에 나오는 주인공 ‘다윗’과 그의 반려견 ‘골리앗’은 당시 미국 사회의 기독교적 가치관을 널리 알리고자 만든 캐릭터였습니다.

클로키 프로덕션은 이 TV 시리즈가 종방된지 30년만에 <다윗과 골리앗의 스노우보드 크리스마스(Davey and Goliath’s Snowboard Christmas)>로 다윗과 골리앗을 부활시켰습니다. 이 TV 스페셜을 통해 제가 최초로 미국 스톱모션 장편의 엔딩 크레딧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죠. 이 작품의 트레일러는 이 포스트의 맨 아래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아트 클로키 프로덕션이 제작한 Davey and Goliath’s Snowboard Christmas의 캐릭터들

2000년대 초반은 제가 뼈대 제작에 필요한 각종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해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해외 스튜디오의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스톱모션의 불모지처럼 여겨지는 한국 출신의 관절뼈대 제작자로서 해외 시장을 개척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한국 스톱모션 업계에 대한 정보가 전무했던 상황에서 해외 스튜디오들은 갑자기 등장한 한국 출신 관절뼈대 제작자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운이 좋게도 제 관절뼈대를 예전에 사용해 본 애니메이터가 2002년 당시 클로키 프로덕션에 몸담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제 뼈대를 강력 추천했죠. 하지만 클로키 프로덕션 입장에서는 제 뼈대에 대한 나름의 검증 절차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제 뼈대의 내구성을 테스트한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았지요.

이러한 테스트는 제 뼈대의 내구성이 어느 정도인지 재차 확인해 보고, 스튜디오의 요구사항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클로키 프로덕션에서도 테스트 사진을 보고 제 뼈대의 품질에 대해 만족했던 것 같습니다.

Davey and Goliath’s Snowboard Christmas의 주인공 캐릭터에 사용된 실제 관절뼈대 중 일부. 2000년대 초반 clay-mate.com으로 알려졌던 시기에 몰두했던 모듈 뼈대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다윗과 골리앗의 스노우보드 크리스마스>는 제가 처음으로 참여한 미국 장편 스톱모션이라는 점 외에 제 뼈대 작업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도 전환점이 된 작품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누구나 쉽게 구입해 사용할 수 있는 규격 뼈대를 만들어 판매하고자 했지만, 이 작품에 참여한 뒤에는 스튜디오들의 각기 다른 니즈에 최적화된 풀커스텀 뼈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굳어졌습니다. 관절뼈대 제작자로서 대중적인 시장보다는 하이엔드 시장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죠. 제 뼈대 작업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고민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제게는 아주 의미가 있었던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난달 아트 클로키와 그의 작품에 관한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예전에 클로키 프로덕션과 함께 했던 작업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현재 클로키 프로덕션을 운영하고 있는 아트 클로키의 아들 부부가 클라우드 펀딩으로 <Gumby Imagined: The Story of Art Clokey and His Creations>라는 책을 출간했다고 하니 관심있는 분들은 아마존닷컴에서 원서를 찾아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